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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석목사설교/주제별말씀

이 세상에서 최고의 스승이 있다는데?

이 세상의 최고의 스승


이 글은 정명석 목사의 2006년 5월 17일 설교 중 일부분입니다.

이 세상에는 스승들이 많습니다 


    이 세상에는 스승들이 많습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예수님은 “내게 오라. 내게 배우라. 내가 쉽게 가르쳐주리라.” 했습니다. 하나님은 “내게 물으라. 내가 가르쳐주마. 점쟁이들한테 앞날을 물어보지 마라. 누구한테 묻지 마라. 내게 물어라. 내가 가르쳐주마.” 늘 그렇게 말씀하시고 선지자들에게 전달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님이 안 보이니까 안 물어봅니다. 기도해서 하나님께 어떻게 될 것인가 계속 물어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만물로 이치를 통해 깨우쳐주시고 정신을 줘서 깨닫게 하고, 그래서 모든 이치를 깨우쳐주고 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물어보라고 했고 예수님은 “내게 배우라”고 했습니다. 나도 여러분 제자들에게 “나에게 배우라. 내가 배운 것이 많다. 배웠다.” 하고 가르쳐줍니다. 성서의 모든 궁금한 것을 가르쳐주고 나머지 세계의 여러 불가사의의 일들도 가르쳐주고 모든 재난이 일어나는 것도 왜 일어나는지 가르쳐주고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 이것은 책임분담 못해서 일어나는 것” 하고 선악을 구분해서 모두 가르쳐주었습니다. 

    하나님은 “내게 물으라. 왜 그렇게 되었는지를.” 예수님은 “내게 배우라. 그것을 가르쳐주려면.”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메시아니까 그때 시대 사람들에게 물으라고 한 것입니다. 나도 이 시대 사람들에게, 제자들에게 “내게 배우라. 내게 가르침을 받아라. 내가 쉽게 가르쳐주마.” 그러지요? “내가 쉽게 가르쳐서 쉽게 하리라.” 어떤 것은 내가 계속 기도해도 하나님께서 시간을 주는 것이 있습니다. 그때까지 가야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되는 것이지 방법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요셉은 하나님께 기도해서 13년 만에 이루어지고 20년 만에 무엇이 이루어지기도 했습니다.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큰 스승은 큰 것을 가르쳐 줍니다

    스승! 큰 스승은 누구입니까? 이 지구상에는 스승들이 많습니다. 소크라테스, 불교의 석가모니, 그리고 유교의 공자, 기독교의 예수님이 있는데 어떤 스승이 큰 스승인지 볼까요?
 
    첫째, 큰 스승은 큰 것을 가르쳐줍니다. 우리가 스승에 대해서 어떤 사람이 큰 스승인가 알아야 됩니다. 길이만 길다고 최고가 아닙니다. 금은 무게가 나가야 됩니다. 금은 길이만 길다고 비싼 것이 아니고 길이가 짧아도 무게가 많이 나가면 됩니다. 그와 같이 어떤 사람이 큰 스승인가 하는 것을 우리가 먼저 알아야 됩니다. 
 
    큰 스승은 큰 사람을 가르쳐줘야 됩니다. 이 지구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가르쳐줘야 됩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그래야 큰 스승입니다. 그렇지 않겠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가장 큰 스승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큰 자를 가르쳐줘야 됩니다. 사람이 큰 자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큰 자를 가르쳐주는 사람이 큰 스승이다. 맞지 않습니까? “큰 문제를 풀어주는 사람이 큰 사람이다.” 이와 똑같은 이치가 아니겠습니까? “큰 일을 하는 사람이 큰 사람이다.” 하듯이 큰 사람을 가르쳐주는 사람이 큰 스승입니다. 일반 사람이 못 가르쳐주는 그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가르쳐주는 사람이 얼마나 큰 사람입니까? 

<그림> 공자

    공자 선생은 가정의 부모를 가르쳐줬습니다. “부모에 순종하라.” 인류의 스승이 네 명이 있는데 그 중에 공자 선생은 “부모에게 잘 하라.” 이것을 가르쳐줬습니다. 부모에 대해서 가르쳐줬습니다. 
 

<사진> 소크라테스

   
    그리고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 하고 ‘자신’에 대해서 가르쳐줬습니다. “자기를 먼저 알고 자신을 먼저 알아야지. 남보다 자기를 먼저 알아야 된다. 자기를 제대로 봐야 남도 보니까.” 그러면서 소크라테스는 철학적으로 ‘자신’에 대해서 가르쳐줬습니다. 

<그림> 석가모니
 
    석가모니는 “인생이 허무하다. 서로 착하게 행하고 긍휼을 베풀고 살아라. 자비를 베풀고 살아라.” 이렇게 인생에 대해서 가르쳐줬습니다. 그것도 근본을 다 가르쳐주지는 않았습니다. 거기에 해당되는 것만 가르쳐줬습니다. 지금 석가모니가 가르친 인생에 대해서 봐도 그렇게 많이 가르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 부모에 대해서 가르쳤어도 공자가 그렇게 엄청난 도를 가르친 것도 아니고 “자신을 알라”는 그 깊은 학문을 가르쳤어도 소크라테스가 그렇게 많이 가르친 것도 아닙니다. 

<사진> 예수님

    예수님은 오던 길로 하나님을 가르쳐줬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어떠하시다고 가르쳐줬습니다. 인간의 죄에 대해서 지적하며 회개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부모에 대해서도 가르쳤고, 자신에 대해서도 가르쳤습니다.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보고 남 눈 속에 있는 들보를 지적하면 모르지만 자기 눈 속에는 들보가 있는데 남 눈 속에 있는 티를 지적하느냐”하며 난절하게 다 가르쳐줬습니다. 인생에 대해서 육신 세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영에 대해서도 가르쳤습니다. 신령하시니까 보이지 않는 영에 대해서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또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가장 깊이 가르쳤습니다. “사랑의 본체다. 근본체다.” 하나님의 이치와 법칙을 여러 가지로 가르쳤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는 근본을 가르쳤습니다. “바로 나를 보고 배워라. 하나님은 그러하신 사랑의 근본자다.” 하고 예수님은 친히 모든 인생들을 천하게 보지 않고 대해주고 위해주고 섬겨주고 또 생활이 그러했습니다. 자기를 반대하고 핍박하는 무지한 사람들을 다 하나님처럼 넓게 용서해주었습니다. 
하나님을 육신을 통해서 배우라고 가르쳐줬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그렇게 가르쳐줬습니다. 위대하지요? 그래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바로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바로 이러신 하나님이구나.’ 하게 되었습니다. 자기 몸소 보여주면서, 핍박받고 고통 받고 이단시하고 적대시하고 사이비 소리를 듣고 적그리스도 소리를 들어도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그래.” 하고 바다가 더러운 물을 받아들이듯이 다 받아들이면서 바다가 수용하듯이 그런 바다 같은 마음을 가졌습니다. 모든 썩은 물을 받아도 다 짠물로 전환시키고 정화시키듯이 예수님은 그런 마음을 가졌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와 같은 마음을 가져라. 그리스도와 같이 완전하라.” 했습니다. 예수님도 수시로 “너희가 하나님처럼 완전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에 대해서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3년 동안 가르쳤는데도 그렇게 많이 가르쳤습니다. 아마 10년, 20년, 30년 죽지 않고 가르쳤으면 어마어마하게 가르쳐놨을 것입니다. 그래서 재림 때 다시 가르쳐준다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고 했습니다. 영으로 오시지 육신으로는 못 오시니까 영으로 와서 가르쳐준다고 했습니다. 

    그 시대에 그런 예수님을 확실히 믿고, 절대적으로 예수님은 죽어서 육으로 안 오고 영으로 온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은 예수님을 영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참 큰 스승입니다
 
    예수님은 참 큰 스승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봤을 때 큰 스승이 아닙니까? 불경을 봐도 이 큰 하나님에 대해서 가르친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공자의 책을 봐도 그렇게 하나님에 대해서 가르친 것은 없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책을 봐도 그렇게 철학적으로 하나님을 가르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신약성경 덩어리 전체에 하나님에 대해서만 가르쳤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 아버지” 하면서 가르쳤습니다. 유대인들은 “어찌 네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아버지라 하느냐? 참람하도다.” 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을 가까이 지냈던 것입니다. 가령, 친구들이 있는데 자기들이 섬기는 사는 선생한테 “자기, 사랑해. 자기. 여보.” 하니까 그 여자를 보고 “너는 참람하도다.” 했습니다. 그 여자는 벌써 그 선생과 사랑해서 애인이 되었는데 그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와 같이 예수님은 모든 사람 위에 뛰어나게 그를 알고 사랑받게 되었습니다. 잘하니까 사랑받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애인이 되었고 사랑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너는 내 아들이라. 내 사랑하는 자다. 너희는 이 말을 들어라.” 그런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모든 사람 중에 하도 하나님을 사랑하니까 “너는 내 아들이다. 너희는 이 말을 들을지어다.” 해서 아들같이 취급을 받고 하나님께서 역사해서 아들로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종으로서 섬겼는데 예수님은 그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것이 도가 아닙니까?
 
    물론 예수님은 하나님이 계획이 있어 보낸 자이지만 또 본인도 깨달은 것이 있고 하는 것이 있어야 됩니다. 옆구리 찔러 절을 계속 받겠습니까? 애인도 제가 알아서 해줘야 됩니다. 맨날 “나 이렇게 해줘라. 사랑해줘라. 이렇게 해줘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본인이 우러나서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도 그렇게 모든 것이 예정되었다고 된 것이 아니라 자기 책임에 의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다 보니까 아들 입장까지 올라간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런 깊은 진리를 가지고 뜻을 세워 나갔습니다. 공자가 그렇게 그 뜻을 세워 나갔습니까? 공자에게 하나님께서 “너희는 이가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이 말을 들어라.” 석가모니에게 “너희는 이 말을 들어라. 내가 사랑하니 이 말을 들어라.” 그렇게 안 했지 않습니까? 소크라테스에게 “너희는 이 말을 들어라.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라.” 그렇게 안 했지 않습니까? 그런 말을 들은 것이 없으니까 자기의 전서, 성경전서와 같은 불교경전, 유교경전에 써놓은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해서 못 써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최고의 스승 중의 스승이시다, 대 스승이시다 라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그렇지 않겠습니까? 내가 신앙생활을 해서가 아니라 4대 성현들을 다 훑어봤습니다. 방금 이야기한 것이 그것입니다. 길고 짧은 것을 재어 봤습니다. 예수님은 길이도 기시고 통도 크시고 그런 입장과 같아서 최고의 스승, 대 스승이 되었습니다. 인류를 근본적으로 구원했습니다. 4천년 동안 하나님이 역사하던 역사를 조건을 세워서 새로운 역사를 펴게 했습니다. 그러니 대단히 크고 엄청난 존재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스승이 되셔서 그 선생한테 내가 배운 것입니다

    예수님이 스승이 되셔서 그 선생한테 내가 배운 것입니다. 예수님께 가르쳐달라고 했습니다. 돈이 없으니까 신학교도 못 가고 신학교에 가봤자 제대로 못 가르치니까 나를 가르쳐달라고 했습니다. 산속에 있을 때 몸부림치면서 겨울철에 등에는 눈이 쌓이고, 춥고 떨리고 온 몸뚱이가 추워서 달달달 개 떨듯 떨고, 얼음이 박히고 동상에 걸렸어도 계속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예수님께 매달려 그 진리를 깨우쳐 달라고 했습니다. 쓰는 것도 없어서 제대로 못 썼고 계속 머릿속에 기억했습니다. 총명해지고 신령해져서 그런 말씀을 다 받아들였습니다. 그것을 머릿속에 넣고 깨닫고 지키고 가서 전도하러 다니고 불쌍한 자, 약한 자, 병든 자에게 기도해주고 기도해서 안 나으면 계속 또 정성들여주면서 기어이 낫게 해줬습니다. 예수님의 정신을 받고 그 사상을 받아서 끝끝내 그렇게 했습니다. 배우기만 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상을 받고 정신을 받아야 됩니다. 

    시 한 편을 읊어줄까요? 이것은 엊그저께 스승의 날에 읊은 것입니다. 이곳은 오늘이 스승의 날입니다. 내가 있는 곳과 여러분이 있는 곳은 시간차가 많습니다. “스승” 이것은 예수님의 시입니다. 그래서 ‘주편’이라고 합니다.

스승 - 주편

내 너를 
가르치지 않았더면
너 내게 
배우지를 않았더면
옛날처럼 월명동 
그 두메산골에
인생 고생 
다 겪으며
살고 있었으리라
   
    이런 시를 읊어주었습니다. 지금에 와서는 다른 세계로 다니고 있습니다. 나뿐만 아니라 여러분도 다 그렇지 않습니까? “내 너희를 가르쳐주고 또 배우지 않았으면 너희들도 그렇게 되리라.” 나도 이 시대에 제자들에게 그렇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도 배웠습니다. 예수님이라는 가르치는 물주가 튼튼합니다. 예수님께 물어봐서 모른다고 하면 “왜 모르냐고. 2천년이나 겪었는데, 영계에서 겪었고 육계에서 겪고 그렇게 많이 겪었는데, 2천살이 더 됐는데 왜 모르냐”고 하면서 기어코 받아냅니다. 어제는 내가 그랬습니다. 
 
“예수님, 내가 만일에 어떤 것을 기도하고 열심히 했어. 그런데 그것이 안 이루어졌어. 정말로 안 이루어지고 그냥 끝나는 거 아니예요? 어떻게 됩니까?”
“안 이루어졌어도 소망으로 열심히 기도해서 마음은 편했지 않았냐? 기쁘지 않았냐?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겠느냐?”
 
    그렇게 가르쳐주십니다. 고수니까 대답을 해도 아주 고수 같이 대답을 하십니다. 여러분도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열심히 했는데 이루어지지 않은 일이 있습니까? 불가능했든지, 뜻이 아니었든지, 몰라서 그랬든지 안 이루어졌습니까? 

    “그동안 마음이라도 기쁘지 않았느냐? 그러면 됐지 않았냐? 마음 기쁘고 즐거웠으면 됐지. 그렇게 인생을 사는 거다.” 그랬습니다.
‘아하, 참 예수님은 대답 못하실 분이 아니시지.’

<사진> 월명동에 있는 예수님 상

    늘 그렇게 살아야 됩니다. 그래야 동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무슨 영체로만 보면 안 됩니다. 지금 오셔서 강림하셔서 살고 계시는 것입니다. 누가 그렇게 실력껏 모시고 섬기고 사느냐 그것입니다. 실력대로 모시고 삽니다. 
 
    예수님도 얼마나 눈이 높은지 압니까? 보통 사람은 안 데리고 산다는 것입니다. 그 뜻대로 사랑스럽게 해야 조금 잘못한 것이 있어도 한 번씩 혼내고 열심히 또 사는 것입니다. 사람이 한 여자를 데리고 살 때도 뭔가 조금 귀여운 것이 있어야 느끼는 것이 있고 뭔가 조금 나은 것이 있어야 데리고 살지 않겠습니까? 그와 같이 이 시대의 모든 사람들도 강림한 예수님과 같이 살려면 그렇게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