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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석목사소개/정명석목사의삶

[나만이 걸어온 그 길] 29. 군대 훈련병 시절의 신앙생활 2

JMS 정명석 목사의 <나만이 걸어온 그 길> 중

군대 훈련병 시절의 신앙생활 2

기독교복음선교회 정명석 목사



훈련 받으면서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게 나는 일이 있다. 기합받은 일이다. M1 250m 사격에서 성적이 좋지 않아 머리를 땅에 쳐박고 엎드려 양손을 등에 얹고 기합받는 일이다. 원산폭격이라는 무서운 기합이었다. 시간은 15~20분으로 기억된다. 넘어지고 또 일어나고, 다시 넘어지면 군화발로 채이고 했다. 이 기합은 나 뿐만이 아니라 많이들 받았다. 
이런 일이 있고 나서 나는 결심하고 사격에 대해 강의할 때 열심히 배우고 연구했다. 그 후 성적이 좋아져서 사격으로 기합받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전방에 배치되었을 때는 특등사수도 되어 훈장도 받았다. 그 후 월남에 파월되었을 때 저격수 임무를 수행했었다. 적이 나타나면 정확하게 총을 쏘는 일이었다. 나는 훈련중에 1시간 훈련이 끝나면 있는 10분 휴식 시간에 성경을 읽든지, 아니면 꼭 훈련을 한 교관이나 훈련 조교한테 찾아가서 수고했다고 인사를 하고 고향을 묻고 이야기를 했다. 처음에는 ‘훈련병이 감히 이야기를 한다.’는 식으로 대했지만 나중에는 은근히 좋아했다. 
훈련 시간에는 으레히 무섭게 독기를 부리면서 훈련을 시켰지만 그들도 똑같은 사람들이었다. 그 때는 지금으로부터 30년전쯤이라 훈련소 훈련이 참 엄하고 무서웠다. 

그리고 굉장히 강하게 했다. 모두 심리적인 불안감에, 명령복종 이라는 단어 아래 훈련 시간에는 정신들이 일도되었다. 그 중에 말을 조금 거슬리든지 행동에 이상이 있으면 시범적으로 맞기가 일쑤였다. 맞는 것을 보면 더 무서워 병사들은 속까지 떨어댔다. 그러나 나는 집에서 일하던 것으로 치면 즐겁고 재미가 있었다. 지휘관과 인사를 하고 지내니 그가 하는 일이 무섭지가 않았다. 제때 밥을 주고, 옷을 주고, 사회에 있을 때 쏴보고 싶었던 총도 주어 쏴보게 하고, 몸도 단련하고 건강해지니 좋았다. 누구는 고향 생각이 난다고 하지만 나는 고향에서보다 먹는 것, 입는 것도 좋았고, 산기도 생활, 고생을 많이 해서 오히려 훈련이 편했다. 산에서 기도 생활하고, 사회 생활할 때 소외감을 받고 살았기에 군대에서 사람들을 만나면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대개 이야기들을 피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나는 노방전도를 하던 습관이 있어 이야기를 잘하는 편이었다. 그 때는 60년대라 가정이고 국가고 생활이 어려운 때였다. 고로 군대에서도 먹는 식사량이 참 적었다.

다들 시골에서 일하느라 많이 먹던 위라서, 군대 정량으로는 너무 배가 고파했다. 어떤 병사는 쓰레기장을 뒤져서 식당에서 나온 무 쪽을 주워먹는 자도 있었다. 나는 금식을 많이 하던 몸이고 또 가난으로 배를 곯다가 간 몸이라 그렇게 미친 듯이 무 쪽을 쓰레기장에서 주워 먹어본 일은 없었다. 그 때 군대밥은 한 공기였고 그것도 거의 보리밥이었다. 쌀이란 1/10정도였다. 밥 한 공기가 몇 수저 먹다보면 없어졌다. 반찬은 국 한 공기하고 깍두기나 김치였다. 그래도 맛있었던 밥은 지금의 어떤 진수성찬의 맛에도 비교가 안 되었다. 

또 모자나 손수건, 밥그릇, 군에서 지급된 물건들이 소대 내무반 내에서 자주 없어져 늘 불안감에 사로잡혔었다. 한 사람이 잃어버리면 그것을 채우려고 결국에는 서로 도둑질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못 하면 돈으로 배상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전반기 훈련으로 7주를 끝마치고 특수 병과가 아니라서 금마 후반기 훈련을 3주간 정도 또 받게 되었다. 내가 큰 학교를 못나와서 또 훈련을 받는 것으로 생각할 때 마음이 착잡했다. 모두 못생기고 못 배운 자들만 또 훈련받으러 온 것 같았다. 후반기 훈련도 참으로 강했다. 여기에서도 사물들을 서로 훔쳐가 모두 자기 물건 챙기느라 잠도 못잤다. 처음 들어올 때는 모두 다 있었는데 가다가 없어지는 이유는 훈련 병사들이 아니라 훈련시키는 내무반의 책임자들이 훈련 다 나갔을 때 도둑질을 해가기 때문이었다. 잃은 것을 못 채우면 돈으로 지도자들에게 배상하도록 해서 돈을 갈취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자기 것이 없어졌으면 자기가 배상하지 않으려고 또 다른 사람의 것을 도둑질했다. 그렇게 연쇄 반응이 일어나 소대 내무반에는 늘상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훈련받고 돌아오면 꼭 자기 사물을 먼저 확인한다. 그래서 무엇이 없어졌으면 재빨리 옆의 사람 것을 갖다 놓는다. 그런 모습들을 여러 번 직접 보았다. 참 마음 안타까운 일이었다. 나보고 자기 물건 누가 가져가는 것을 못 보았느냐고 물을 때 나는 알고도 대답을 할 수가 없어서 괴로웠다. 나는 확실히 모르겠다고 얼버무릴 수 밖에 없었다.

어느 날 한 번은 밤 9시 점호 때 사물 점검이 있다고 모두 준비해 놓으라고 했다. 나는 사물이 모두 있는지 확인해 보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수저가 없었다. 너무 충격을 받고 다 뒤져보아도 없었다. 나에게 너는 무엇을 잃어버렸느냐고 해서 소리를 지르면서 수저가 없어졌으니 누가 있으면 달라고 했다. 그러나 아무도 남는 것이 없었다. 그리고 뭘 잃어버리면 자기만 알고 있다가 남이 잠잘 때나, 화장실 갔을 때 슬쩍 훔쳐 와야지 이야기하고 떠들면 안 되는 것인데 나는 광고하고 동네 방네 떠들어서 남의 것도 훔칠 수가 없게 되었다.

모두 어서 철조망 밖에 나가서 사오라고 했다. 너무나 당황되고 긴장이 되어 틈을 타서 군대 교회로 뛰어가 군종 목사한테 찾아갔다. “오늘 밤 9시 점호 때만 사용하고 가져올 테니 수저 하나만 빌려주세요.”라고 했다. 내가 교회 나오는 줄 군목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군목은 “야, 이놈아. 수저 빌려주면 나는 손으로 먹게?”하고 안 된다고 했다. 갖은 사정을 해도 안 된다고 했다. 그럼 하나만 팔라고 했으나 여유 있는 것이 없다고 했다. 그럼 하나 구해 달라고 하니 어디 가서 구하느냐고 말했다. 대위 장교 목사님이니까 점검 점호를 안하는 부대 교인한테 이야기 좀 해달라고 했다. 결국 이 사정 저 사정 알아들을 만큼 이야기 했으나 그는 사정을 들어줄 수 없고, 별 것도 아니니까 그냥 없어졌다고 하고 때리면 몇 대 맞고 말라고 했다. 정말 야속하고 인정머리 없는 군종 목사였다. 

‘아니, 군종 목사가 자비가 이라도 없고, 긍휼이 이리도 없을까?’ 자기 교인인데 그리스도의 냄새가 풍기기는커녕 무정의 냄새만 물씬물씬 풍겼다. 희망을 품고 달려간 발걸음과 날아갔던 몸은 그만 좌절하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뒤돌아 보지도 않고 나왔다. 그때 나는 ‘이런 지도자나 목사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가 잘못하여 잃어 버린 것이니 내 잘못으로 돌리고 말자.’고 생각하며 내무반으로 돌아왔다. 

그 이후 그날 온종일 무엇을 했나 생각이 안난다. 희미하게 기억이 나서 영감으로 생각해 보니 9시 점호에 준비를 온종일 한 것 같았다. 드디어 9시가 되었다. 나는 체념하고 점검에 임했다. 그래도 큰 것 잃어 버리지 않고 작은 물건인 수저를 잃어 버려서 다행이었다. 온 내무반이 어떻게 채웠는지 물건을 다 채우고 나만 못채웠다. 이보다 먼저 예비 검열 때 내무반장이 자기 사물없는 사람 나오라고 해서 내가 나갔더니 빨리 채워 놓으라고 했었다. 어디가서 사오든지 하라는 것이었다.

내무반장은 내가 무엇을 잃어 버려도 남의 것을 훔쳐 채우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때리지 않고 몇 마디 말만 하고 마는 것을 나는 깨닫게 되었다. ‘이것을 어디 가서 채우나?’하고 고심하며 성경을 보다 군복 상의를 입은 채로 잠이 들었다. 아침에 기상해서 일어나 보니 좌측 가슴이 너무도 저리고 아팠다. 성경을 보다가 훈련복을 입은 채로 수저 생각을 하며 잠이 든 것이었다. 수저가 없는 것을 지휘관이 봐준다고 해도 밥을 먹을 수 없기에 당장 문제여서 더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가슴이 너무도 저리고 아파 왜 이러나 하고 가슴을 더듬어 보았다. ‘이상하다.’ 마루 바닥에 무슨 물체도 없었는데 분명 통증이 심했다. 좌측 포켓에 손을 넣어보니 찾던 내 수저가 나왔다. 너무나 황당무계했다.

‘아니, 이놈의 수저, 그렇게도 찾았을 때는 어디가 있고. 왜 내가 포켓에 수저를 넣었지?’ 생각해 보았다. 결국 내가 넣은 것이었다. 내무반 안에서 물건을 너무 훔쳐가서 싸서 아예 못 훔쳐 가게 밥을 먹으면 포켓에다 넣고 다닌 것이다. 지나치게 안 잃어 버리려고 안전하게 한 것이 그렇게 되었다. 이제 생각해 보니 내 인생을 예수님은 테스트한 것이었고, 너무 염려되어 지나치게 한 것이 나의 잘못임을 깨닫게 되었다. 내무반에다 수저 찾았다고 수저를 보여주면서 말했더니 바로 고문관으로 취급을 하기도 하고, 그 중에는 정말 교인이라 남의 것 안 훔쳐가는 양심적인 사람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또 어느날은 사회에 있을 때 옷을 다려 본 사람들이 있느냐고 해서 손을 들었다. 모두 확인하는데 보통 세탁소에 근무하거나 운영을 했던 사람들이었다. 나도 옷을 많이 다려 보았다고 했다. 어디서 했느냐고 물어서 월명동이라고 하니까 앞 글자를 못알아 듣고 명동인줄 알고 나오라고 해서 6명이 인솔자를 따라갔다. 며칠 있으면 이 옷들을 입고 배출대로 가서 신고하고 전방으로 간다고 했다. 나는 사실 옷을 다려본 일이 많지 않아 은근히 떨렸지만 막상 가서 해보니 아무것도 아니였다. 그런데 나는 다림질을 하지 않고 지시를 했다. 

내가 하니 서툴다고 갯수나 파악하라고 했기 때문이다. 훈련 안받고 좀 편하려고 했던 것인데 온종일 그 좁은 군대 세탁소 안에서 한증막 신세로 비지땀을 흘리면서 고생을 했다. 700벌 이상을 온종일 다림질했던 기억이 난다. 3일 후 이 옷을 입고 신고하고 배출대로 떠났다. 그 때 좋은 장소로 가게 해달라고 그렇게 기도를 했던 것이 생각난다.

결국 강원도 육군들이 가는 103보 최전방으로 갔다. 첩첩산중이라 야속했다. 그리고 고생할 것을 생각하니 앞이 캄캄했다. 전방에 배치되어도 우리는 훈련을 또 받게 되었다. 소속 부대는 백마 부대였다. 다음에 연속해서 쓰려고 한다. 이때는 일기를 쓰지 않아 정말 이만큼 쓰기도 힘들었다. 생각이 안나서 밤새 기도하고, 30년 전의 일을 영감으로 받아 그 실상을 생각하며 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