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MS 정명석 목사의 <나만이 걸어온 그 길> 중
백마부대에서의 훈련과 파월2
글 : 기독교복음선교회 정명석 목사
정명석 목사
7주 이상 훈련을 받았는데, 마지막 코스는 도롱태를 타고 강 위로 하강하다가 공중에서 떨어지는 코스였다. 서로 앞에 안 타려고 했다.
교관은 “첫번째 정신 안 차리고 내 말을 듣는 대로 안 하면 죽는다. 내 명령은 생명이니 듣고 꼭 그대로 하라.”고 했다. 절벽 위에서 강인가 냇가인가 내려다보니 까마득했다. 훈련도 전투이니, 훈련 중에 죽으면 전투에서 총맞아 죽은 취급을 해주어 전사비가 나오니 개죽음은 아니니까 걱정 말고 훈련을 받으라고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는 말이 “한번 타보고 또 타겠다고 사정하지 말라.”고 했다. 왜 이 무서운 코스를 또 타느냐고 물으니 너무 재미있어서 또 타본다는 사람이 90%이상이라고 했다. 이 중에 멋있게, 담대히 타는 자, 폼이 좋은 자 5명만 골라 다시 탈 수 있는 기회를 준다고 했다.
결국 “올빼미 하강 준비 끝!”하고 자기 애인의 이름을 부르면서 내려가게 했다.
소리를 들어보니 이미 질색해버린 소리, 신음소리를 내면서 가고 있었다. 나는 하나님을 부르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결국 내 차례가 돌아왔다. “자신 있나?”라고 교관이 물었다. 자신있다고 했다. 애인 이름을 부르며 내려가라고 했다.
나는 애인이 없으니 내가 믿는 하나님을 부르면서 내려가기로 이미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올빼미 하강 준비 끝!”하니 하강했다. 발바닥이 땅에서 뜨니 그야말로 온몸이 찌릿했다. 애인 대신 하나님을 불렀다. 순식간에 푸른 강이 보였다.
생각하는 것보다 빠르지는 않았다. 공중에서 더 머무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스릴이 그야말로 만점이었다. 이제 손을 로프에서 도롱태와 같이 놓아야만 할 순간이 왔다. 만일 공중에서 강물이 무서워 놓지 않으면 앞에 있는 콘크리트 기둥에 그대로 부딪쳐 죽기 때문에 놓아야만 했다. 손을 놓으니 공중에서 그대로 떨어져 물 속으로 푹 들어가 몇 번 오르락 내리락했다. 물 좀 먹고 기어 올라왔다. 나의 임무는 끝난 것이다.
오는 길만 남아 있다. 강 위로 로프를 메어놓은 걸 잡고 다시 건너오는 일이었다. 정말 한 번 더 타보고 싶었다. 너무 재미가 있고 스릴 있는 훈련이었다. 교관이 한 말이 그제야 믿어졌다. 그러나 또 타보겠다고 하다가 욕만 얻어먹었다. 중대원 전원 중 몇 명은 다리가 부러지는 사고가 발생했다고 전해 들었다.
그 후 연속 훈련을 계속하고 마지막 훈련은 월남 지역을 그대로 복사한 지역에서 실전 비슷한 훈련을 20여 일 간 한 후에, 박정희 대통령 4공화국 때였는데, 66년 8월 백마 부대 1진으로 양평에서 군용트럭으로 서울로 이동하여 여의도 광장에서 신고식을 했다. 그 때 여의도에는 집 한 채, 건물 한 채가 없었다. 사하라 사막을 상징하는 듯 그야말로 모래만 바람에 휘날렸다. 행사가 끝나고 1시간 동안 면회 시간이 있었다.
시골에서 올라온 아버지와 큰형 인석 형님과 형수님 세분이 면회하러 오셨다. 그 때 같이 사진도 찍었었다. 잘 갔다 오라는 기도를 해주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잘 갔다 올 것을 믿는다고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편지 자주 하라고 했다. 내가 오히려 가고 싶어하는 태도를 보였더니 기뻐하시며 돌아가셨다. 면회 시간 끝나고 이어 서울 시가 행진이 진행되었다. 광화문으로 서울역으로 환호하는 국민들에게 이기고 돌아오겠다고, 연합군으로서 대한 민국의 큰 위력을 세계에 보여주고 오겠다고 다짐하며 의젓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전쟁터에 가서도 이 모습 그대로일까?’ 생각하면서 나는 행군했다. 그 때 나는 서울 시내를 처음으로 보았다. 정말 이런 세상도 우리 나라에 있었나 생각하면서 ‘살아 돌아오면 서울에 올라와 살아야지.’ 삶의 계획도 해보았다.
서울 시가 행진은 너무 의미가 있었고 구경도 잘했던 추억이 있다. 촌놈이 한국에 살면서 서울 구경도 한 번 못 하다가 전쟁터에 가서 죽기 전에 겨우 해본다는 것을 생각하니 참으로 한심스럽기도 했다. 나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눈동자들을 보고 또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니 거반 서울 구경을 못한 자들이었다.
시골 초가집을 보다가 빌딩을 보니까 상상이 안 되는 모양이었다. 너무나도 웅장함을 체감한 날이었다. 그 때는 구경 잘 했으니 이제 전투 지역에 가서 죽어도 좋다는 마음까지 들었을 정도로 참 마음이 만족스러웠던 것 같다.
행군이 끝나고 이어 열차편으로 부산으로 떠났다.
부산 부두에 도착하여 바로 큰 군함에 올라탔다. 군함을 보고 멋있는 건물로 생각했었는데 알고 보니 우리가 타고 갈 월남으로 가는 3000톤급 배였다.
부산에서는 육군 군악대가 나와서 환송해주었다. 가슴이 뭉클했다. 마지막으로 배 위에서 고국땅의 끝을 보고 있었다. 계속 울려 퍼지는 군악대 음악, “마지막으로 다시 돌아오마 부산 항구야. 미스 김도 안녕, 미스 리도 안녕.” 연주의 노래였다.
그 때부터 모두 울먹이면서 눈물들을 흘리기 시작했다. 용감스런 모습에 푸른 제복을 입었지만 고국을 떠나 죽음의 전장으로 가는 마당에는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정말 이 중에 얼마나 살아서 올 수 있을까?’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지막 뱃머리를 돌리며 기적 소리가 났다.
환송 나온 부산 시민들이 울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모두 까마귀 우는 전쟁터로 가는 가족, 민족의 동족 젊은이들이 불쌍하다는 듯이 초상집을 방불케 하듯 슬픈 얼굴빛과 눈물들을 감추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나를 위해 울지 말고 자신을 위해 울라.’고 기도하며 얼굴을 돌려 멀리 섬들을 쳐다보았다.
일단은 월남 전쟁 때문에 강원도 구경, 서울 구경, 부산 구경, 태평양 구경을 너무 잘하게 되어 기쁘고 즐거워 매일 찬송 부르고 갑판에 나와 노래했다.
7주일 항해 끝에 월남 나트랑 항 5백 미터 전방에 배가 정착했다.
갑판으로 나와보니 야자수 수목이 대지를 덮었고, 폭음 소리들이 귀청을 울렸다.
모두 ‘전쟁터구나.’ 하고 긴장감이 가슴에 돌기 시작했다.
나도 가슴이 점점 뛰기 시작했다. 폭음 소리가 연속해서 자주 쿵쿵거리며 났다. 마지막으로 배 안에서 교육이 있었다. 내일 아침 새벽 3시경에 나트랑 항에 바짝 대어놓고 수송자는 전 ○○지점으로 간다고 예고했다. 모두 얼굴빛들이 긴장된 모습들이었다.
나는 그래도 신앙으로, 믿음으로 담대한 마음을 가졌기에 긴장은 덜 되었다. 불안할 때마다 나는 기도하며 그 불안을 해소했다. 나에게 깨우친 생명의 말씀은 “어디를 가든지 나 하나님을 믿고, 주를 믿을 지니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하리니.”였다.
첫날밤 나트랑 산악 지역에서 근무를 섰다. 그날 밤 병사들이 너무 긴장되어 있었는데 앞에 있는 것을 다 적으로 간주하라는 지휘관들의 말을 듣고 더욱 긴장한 나머지 근무 서던 병사가 자기 옆에서 잠깐 볼 일 보러 나간 병사 2명을 적인 줄 알고 확인도 하지 않고 사격하여 벌집을 만들어놓은 사건이 일어났다.
온 부대가 총소리에 비상이 걸려 확인한 결과 아군이 화장실을 간 것을 모르고 사격한 것이었다. 너무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전쟁터는 아군이 아군을 죽이는구나.’ 결국 몰라서 너무 긴장되어서 그런 것이었다. ‘사람이 한 가지만 알고 한 가지를 모르고 행하면 죽는구나.’ 생각하니 아는 것이 이제 생명을 살리는 것임을 더욱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을 위해 그 영혼을 하나님께 부탁했다.
억울한 죽음이었다. 기가 막힌 죽음을 당한 셈이었다. 그 후 알고 보니 그 곳은 그렇게 긴장하고 적이 올 만한 지역도 아닌 안전한 후방 대기 지역이었다.
긴장이 사람을 죽이게 한 것이다. 지휘관들의 무지도 개탄스러웠다. 지도자의 무지는 죄없는 생명을 앗아가게 했다. 그리고 그 수없는 훈련을 받았는데 훈련받지도 않은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일이 다 지난 다음에 인간의 무능, 인간의 무식이 드러나는데 대개는 너무 어처구니 없는 무지일 때가 많음을 나는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지금도 이 역사를 이끌면서 이런 안전 사고가 일어나지 않는가 나는 검토해본다.
이전 글 보기 - [나만이 걸어온 그 길] 30. 백마 부대에서의 훈련과 파월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