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MS 정명석 목사의 <나만이 걸어온 그 길> 중
생명은 생명으로 - 월남에서 1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걸어온 길이 험난했다고 다들 말한다.
나 역시도 나의 삶의 길이 고달펐고 괴로웠으며 또 다시 걷고 싶지도 않을 뿐 아니라, 걸으려 해도 불가능한 험난한 삶의 길이었다. 한 때는 너무 어려워서 삶을 포기하고 살았던 때도 있었다. 의식주 문제와 환경 때문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마음의 좌절이 문제였다.
따가운 태양 빛이 얼굴이 그을리도록 내리쬐고, 먹장구름에 장대같은 비가 쏟아진다.
67년 4월, 나의 고향 하늘이 아니라 이국 땅의 전선의 하늘이다. 말로만 듣던 피비린내, 또 말로만 듣던 전투, 전쟁터, 말로만 듣던 총격전…이제는 내가 직접 주인공이 되어 그 속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신음과 고통, 그리고 삶의 소망, 생명의 가치성, 죽음, 인생의 허무, 신의 의지 등과 모두 한자리에서 피할 수가 없이 씨름을 할 뿐이다. 눈 앞에 보이는 것만을 생각할 수밖에 없고, 또 다른 행동을 할 수 없는 처지이다.
전쟁터의 밤은 더욱 괴롭다.
전쟁터의 촌락에는 초저녁부터 창틈으로 새어나오는 희미한 등불마저 일찍부터 꺼버리기 때문에, 대지는 더욱 어둡고 고요하기만 하다. 밤이 깊을수록 포 소리와 소총 소리는 자라만 갔다. 투이호아 해안의 그 넓고도 넓은 대지 여기저기에서는 적군과 아군들의 야간작전이 벌어진다. 여기서 ‘꽝’, 저기서 ‘따콩’하는 소총 소리.
밤만 되면 삶과 죽음의 대지여서 더욱 신경이 골속까지 쓰인다. 이 마을 저 마을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린다. 도둑이 와서 짖는 개소리가 아니다. 적군들이 밤에는 마을로 침투해온다. 개가 짖으면 이미 적들이 마을로 들어간 것으로 아군들은 적들의 동태를 파악한다.
초저녁, 땅거미가 내리는 시간. 눈 밑의 땅이 보일락 말락하는 시간, 그믐밤 어둠이 대지를 꽉 메운 밤이다. 오늘도 매복에 완전 군장을 하고, 한 임무를 받고 나섰다.
차이산과 혼바산 사이를 통하여 투이호아 한국군 부대를 공격하거나, 월남 마을에 침투하여 양식이나 의료품을 구하러 오는 적들을 매복하여 그들을 먼저 보고 살상시키는 임무였다. 어둡고 캄캄한 칠흑 같은 대지를 박박 기어갔다. 논바닥, 수렁탄에서 얼마간 낮은 포복을 하였고, 또 작은 내를 건넜다. 50m 정도를 코가 땅에 닿도록 기었다.
큰 산, 혼바산이 희미하게 보이고, 차이산도 보였다. 매복 지점에 다 온 것 같다. 소대장으로부터 제 자리에 정지하라는 신호가 오고, 또 횡적으로 배치하라고 분대장을 통해 전달이 왔다. 우리는 신속히 적의 매복시 공격하는 지뢰무기인 크레모아를 설치했다. 한참 우리들의 매복 진지를 만들고 있는 중에 적들은 이미 캄캄한 칠흑 같은 암흑 속으로 아주 가까이 오고 있었는데, 우리도 그들도 서로 모르고 있었다.
우리 인원의 일부를 배치하고, 일부는 매복시설 폭발물을 설치하는 중에 적과 서로 부닥치고 말았다. 다행히 우리가 폭발물을 시설한 곳으로 적이 기어오는 것을 아군이 먼저 발견하였다. 옆에서는 같은 소대 전우들이 시설물을 배치하는 중이기에 급히 적신호를 보내어 안전지역으로 돌아가 은폐케 한 후 크레모아를 폭발시켰던 것이다.
나는 그 때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갑자기 적이 나타났다는 연락을 받고 순간 엎드려 있었다. ‘꽝’하고 큰 폭탄이 터지는 소리에 골이 울리고 고막이 터질 것만 같았다. 너무 순간적이고, 갑작스런 일이라 심장이 놀랬는지 순간 답답했다.
조명탄이 터지고 총격전이 벌어졌다. 총을 어둔 밤 산 쪽, 적의 방향으로 쏴댔다. 야간 신호탄이라 총탄이 날아가는 것이 조명탄처럼 보였다. 이런 비상용 소형 조명탄들을 터트리어 주위가 대낮같이 환하였다. 이어 대대에서 지원 공격으로 대형 조명탄을 쏴주어 쥐새끼가 기어가는 것까지 보이도록 환했다.
내 자리에서 10m 앞으로 나갔을 때 아군이 터트린 크레모아에 적들이 맞아 여기저기 쓰러져 죽어있는 것이 보였다. 우측으로 몸을 돌려보았을 때,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는 밥공기만한 흰 덩어리가 보였다. 무엇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가 확인할 겸 손으로 만져보았다. 물컹했다. 그리고 따뜻했다. 깐 호도알처럼 생겼다. 핏줄이 이리저리 얽혀 있었다. 전혀 깨어지거나 흐트러짐도 없었다.
조명탄이 순간 비추었다 사라지기 때문에 조명탄이 꺼지자 대지는 다시 캄캄하게 되었다. 옆에서 모두 웅성대고 왔다갔다 하며 시체를 통해 몇 명이 죽었는지 확인했다.
그리고 고함들을 쳐댔다. “총은 찾았다. 왜 적이 죽었는데 총은 없는 거야?” 옆에서는 이런 소리 저런 소리로 시끌덤벙이었다. 나뿐 아니라 모두가 조명탄이 꺼지니까 순간 각자 임무를 할 수가 없었다. 랜턴만 켜들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앞에 있는 적의 시체나 적의 총 찾기에 혈안들이었다. 나는 이것이 무엇인가 궁금해 다시 랜턴을 켜서 확인했다. 그 때도 김이 모락모락 났다. 쪼그리고 앉아서 만지며 자세히 보니 적의 골이었다. 방금 크레모아가 터질 때 기어오다 폭발하는 바람에 머리가 깨어져 골이 튕겨 나온 것이었다.
너무 섬짓했다. 피비린내가 옆에서 진동했다. 주변에는 적 몇 명이 쓰러져 있고, 깨진 머리는 발견하지 못했다.
멀리에서 조명이 ‘꽝’하고 터졌다.
산 쪽을 쳐다볼 때 적이 걸어가다 순간 엎드리는 것이 보였다. 약 30m쯤 되었다. 신속히 그 쪽으로 뛰어갔다. 거의 다 달려갔을 때 조명탄은 시간이 되어 꺼져 버렸다. 캄캄하기가 그지없었다. 아무리 찾아도 적은 없었다. 그 적은 내가 뒤에서 잡으려고 뛰어온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계속 손으로 더듬어 보고, 발로 여기저기를 더듬어 밟아보았다.
‘여기가 아닌가?’ 하고 조금 더 가보려고 5~10m를 더 걸어가면서 계속 더듬어 나갔다. 묵은 논은 완전히 낮은 늪지대가 되어 있었다. 랜턴을 비추면서 찾으려 해도 적의 공격 때문에 불을 켤 수가 없었다. ‘분명히 요 근방인데….’ 얼마나 어두웠던지 눈을 떴어도 감은 것이나 다름이 없는 밤이었다. 발로 이리저리 휘젓고 다니는데 무엇인가 물컹하고 발에 밟혔다. 사람이면 소리가 날 것인데 이상하다 생각하고 손으로 더듬어 보았더니 분명 사람 같았다. 랜턴을 땅바닥에 낮게 비추어 보았다.
적이 고개를 땅에 처박고 바짝 오그리고 엎드려 있었다. 이놈의 적이 발자국 소리가 나니까 캄캄한 어둠에 몸을 은신하고, 풀 속에 순간 숨었던 것이다. 그렇게 안도의 순간을 가진 후 또 기어서 안전한 산 쪽으로 도망치려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