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MS 정명석 목사의 <나만이 걸어온 그 길> 중
은밀히 역사하시는 하나님1
6월 폭염, 땡볕 땅에서 훈김이 후끈거리고 섭씨 36~38도가 넘는 한 더위다. 보리베기 그 뜨거운 몸부림치던 날들, 날마다 땀으로 목욕을 해야 하는 고달픈 달동네 삶, 아마도 글로는 다 표현할 수가 없고, 읽을지라도 그 때 그 심정을 모를 것이다. 나와 같이 그 환경을 겪은 내 형제들, 그리고 고달픈 그 길을 걷는 자는 이 글을 읽으며 너무도 그 속을 잘 알 것이다. 찌는 듯한 여름 보리베기 타작, 한 술 보리밥에 반찬이라야 고추장 하나, 할 수 없이 마늘밭에 가서 마늘을 한 주먹씩 마구 뽑아서 고추장에 찍어 먹으며 푸념을 늘어놓는다.
“아, 이렇게 몸부림쳐도 꽁당보리밥 한 술에 고추장, 마늘뿐이냐. 인생 살기 너무 힘드는구나. 살자니 청춘이고, 죽자니 너무 내 인생이 억울하구나.” 꽁당보리밥 놓고 그 환경에 그래도 하나님 앞에 기도했다. 감사해서라기보다 내 인생 꼴을 두고 푸념하는 기도였다.
누구는 복을 받아 진수성찬 놓고 감사 기도하는데 아. 이게 무슨 꼴이냐며 하나님 보라고 울먹이기도 했던 것이다. 응달인 나무 그늘에도 들어가지 않고 보리 베던 밭고랑에 그대로 주저앉아 기도했다. 인생이 너무 격차가 많다고, 한 번 나를 보라는 기도였던 것이다.
똑같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빈부의 차이가 너무 난다고 그리고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하는 자가 사는 꼴 좀 보라고 이 땡볕에 주저앉아 기도를 한 셈이었다. 그 때 “인생이 그 얼마나 맛있게 먹고 사느냐가 문제가 아니고 그 얼마나 의롭게 사느냐가 문제다. 이렇게 사는 것이 인생의 최고의 가치다” 라는 하늘의 음성이 들렸다. 뒤통수를 쇠뭉치로 맞은 듯 머리가 찡했다. 나는 위로를 받고 도움을 받으려 했는데 오히려 하나님은 “네 인생의 고통과 의식주의 뼈아픈 여건들은 문제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의(義)가 문제라는 것이었다.
먹고 사는 의식주 문제가 아니라 의(義)에 굶주리는 것이 문제!
먹고 사는 의식주가 문제가 아니라 의(義)에 굶주리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었다. 의식주야 그날 그날 먹고 살면 되는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도 걱정이 안 된다는 말씀이었다. 내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그 때 나는 또 다른 심정과 인생의 가치의 도를 깨달았다. 그 때 나는 알고 보니 최고 극치의 건강 음식을 먹고 살았던 것이다.
마늘을 밭에서 30통 이상 뽑아다 먹었으니 건강이 얼마나 좋았으랴. 옛날 웅녀는 쑥과 마늘만 먹고 살았다는데 이후에 내가 알고 보니 다 신이 주신 선물이었다.
잠언에 ‘무지한 말로 나를 거스린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내가 바로 그 무지한 자였다. 하나님은 나를 건강의 초인이 되게 하여 역사를 뛰고 하늘을 증거케 하는 자가 되도록 최고로 신경을 쓰셨는데도, 그리고 늘상 사랑을 받았는데도 그 사실을 몰라서 인생의 얼굴을 찌푸리고 살았던 것이다.
하늘의 심정을 썩인 것을 이 순간에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회개란 걸 또 하고 싶은 심정이다. 모두와 같이 나만이 걸어온 길을 같이 걷고 싶다.
현실 보고 탄식하던 그 날들을 내 무지로 인해 더욱 마음 고생을 하늘에 닿도록 더한 셈이다. 이사야 40장 27~31절 (독수리 신앙)이 더욱 내 이야기에 생명력을 준다. 하나님을 제대로 몰랐던 것이었다. 나는 잘 믿는다고 믿고, 잘 안다고 하면서 믿었건만 너무 어린애 같은 얄팍한 지식이었다. 그런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 심정을 날마다 썩일 수 밖에 없었고, 먼 훗날 오늘을 감히 내다볼 수가 없을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 체질적인 초인의 건강은 내가 운동을 많이 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수십 년 전부터 은밀하게 역사하셨던 하나님의 철저한 관리에서 온 것임을 절실히 깨닫고, 한 시도 쉬지 않으며 초인의 몸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를 따르려는 무리와 영광을 아끼지 않는다.
고로 밤낮 뛰고 달린다. 누구는 아직도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 생각 주관에 빠져 판단할 것이다. 그 힘을 가지고 이 글도 거침없이 쓰며 나만이 걷는 펜 길을 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