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정명석 목사는 기독교복음선교회의 총회장이며, 충청남도 금산군에 소재한 월명동 수련원의 창립자, 시인이기도 하다.
정명석 목사가 걸어온 길
1945년 | 전라북도 금산군(현 충남 금산군) 진산면 석막리 월명동에서 출생 |
1966년 8월 | 베트남 전쟁 1차 참전(백마 9사단 : 현 대한민국 9보병사단) |
1969년 9월 | 화랑무공 훈장, 인헌 훈장 등 4개 훈장 수여 (자세히보기) |
1981년 3월 | MS선교회 창설(대표 취임), 애천교회 창립 |
1983년 11월 | 웨슬레 신학원 졸업, 전국 8개 도시 교회 설립 |
1986년 9월 | 예수교 대한 감리회(진리) 창립 |
1989년 | <영감의 시> 1집 출간 |
1990년 | <하늘말 내말> 1집 출간 |
1991년 3월 | 자연수련원 월명동 개발 착공 |
<비유론> 출간 | |
1995년 | 월간 <문예사조> 신인상 당선, 시인 등단 |
1996년 | <영감의 시> 2집 출간 |
1998년 | 충남대학교 행정대학원 최고경영자 과정 수료 |
<생명의 말씀> 1집 출간 | |
1999년 8월 | 국제문화예술평화협회 세계문화교류 GACP 창설 |
제 1회 프랑스 파리 대회 개최 | |
2001년 11월 | 스리랑카 유네스코 산하 오픈인터네셔날 대학교(The Open International University for Complementary Medicines) 철학박사 학위 취득 |
2002년 8월 | 제6회 국제문화예술평화협회(GACP) 컨퍼런스 개최, 한국 대전 |
2003년 | <생명의 말씀> 2집 출간 <생명의 말씀> 3집 출간 |
2004년 | <하늘말 내말> 2집 출간 <하늘말 내말> 3집 출간 <하늘말 내말> 4집 출간 |
2005년 | <구원의 말씀> 1집, 2집, 3집 출간 |
<하늘말 내말> 5집, 6집 출간 | |
2008년 | 기독교복음선교회 총재 |
2011년 | <한국시 대사전>에 시 10편 등재 |
UWA퍼스국제아트페스티벌(UWA Perth International Arts Festival) 그림 <운명> 대표작 선정 | |
2012년 | <하늘말 내말> 7집, 8집, 9집 출간 |
2013년 | 영감의 시 3집 <시의 여인> 출간 |
영감의 시 4집 <시로 말한다> 출간 | |
2016년 | 영감의 시 5집 <행복은 온다> 출간 |
2018년 | <사랑은 전쟁은 잔인했다, 사랑과 평화다>출간 |
2018년 | 조슈아 정 가을음악회 '내가 한다면' 개최 |
2019년 2월 | 조슈아 정 콘서트 <승리했다 이기었다> 개최 |
2019년 | 영감의 시 6집 <하루에 쓴 시> 출간 |
2020년 | 영감의 시 7집 <시 좋아> 출간 |
2021년 | 영감의 시 8집 <만남> 출간 |
2022년 | 영감의 시 9집 <희망 길> 출간 |
<죽음에서 살려주신 절대신 하나님> 출간 | |
2023년 | 영감의 시 10집 <시와 대화> 출간 |
영감의 시 11집 <동행> 출간 | |
2024년 | 영감의 시 특별시집 <시의 붓으로 전한다> 출간 |
2025년 | 영감의 시 13집 <하루에 쓴 시 - 보화> 출간 |
영감의 시 14집 <하루에 쓴 시 - 단장> 출간 |
출생 - 10대
정명석 목사는 1945년 3월 16일(음력 2월 3일), 전라북도 금산군 진산면 석막리에서 부친 정팔성과 모친 황길례 사이에서 6남 1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태어난지 얼마 안돼서 병에 걸려서 죽을 뻔 한 적이 있다. (자세히보기)
어릴 때부터 지독스런 가난을 겪었다. 변변한 땅이 없어 농사를 지어도 거둘 곡식이 적었고 죽으로 끼니를 해결하는 게 다반사, 낮에는 칡뿌리를 캐러 산으로 다녔다. 초등학생 시절 점심시간이면 학교운동장 수돗물로 배를 채우기도 했다. 10대 초반부터 ‘사람이 왜 살아야 하는지,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지? 하나님은 왜 인생을 창조하셨을까?’ 고민했다.
8살 때 어머니가 우상에 절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을 찾으라고 이야기했다. (자세히보기)
9살부터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처음 교회에 나간 곳은 석막리 마을에 있는 장로교 사랑방 교회였다. 정명석 목사는 그 당시 미국 선교사인 인돈 목사(William A.Linton, 윌리엄 린튼, 한국명 인돈)에게 세례를 받았다. 린튼 선교사는 미국 남부에서 한국으로 파견되어 대전 한남대학교를 설립한 선교사로 유명하다.
15살부터는 산 기도를 했다. 낮에는 부모를 도와 농사일을, 밤이면 대둔산과 폐광에 들어가 성경을 읽고 또 읽으며 기도했다. 노방전도하고 다니며 가난하고 불쌍한 자, 병들어 고통 받는 자, 귀신 들린 자들도 고쳐 주었다.
주변 산, 특히 대둔산에서, 그리고 고향 주변 광산 굴에서 깊이 기도했다. 못 먹고 지낸 산속 생활, 굴속 생활은 그야말로 고통이었다. 창세기 1장 1절부터 하나님과 예수님께 기도하며 성경을 자세히 읽기 시작했다. 예수님은 "성경을 자세히 읽어라. 자세히 읽지 않으려면 읽을 필요가 없다. 답도 성경에 있고 문제도 성경에 있느니라" 하셨다.
산에서 기도하는 동안, 특히 16세부터 20세가 될 때까지는 전단지를 가지고 다니며 노방전도를 했다. 군대 가기 전까지 기도하면서 말씀을 전했다.
20대

1966년, 22살에 육군 제9사단 백마부대. 월남에 파병되었다. (자세히 보기)
(그 당시 정명석 목사의 전우였던 정원도 씨의 글 보기)
(채명신 예비역 장군 | 당시 주월한국군사령관이 본 정명석 목사 영상 보기)
로버트 폴리 장군(미국 명예훈장 수상)의 인터뷰 영상 보기
1966년 1차 파월이 끝나고 1967년 재파월, 1969년에 한국으로 귀국했다.
1차 파병(1966년 8월 30일~1967년 9월 24일) 13개월 동안, 실제로 그 말씀을 전심을 다해 실천했다. 죽이지 않고 살리는 전쟁, 적군까지 품는 기도, 백전백승의 실전 기록과 중대원들의 기적 같은 생존. 그러나 그가 귀국한 후 5개월 동안, 그가 없는 부대에는 연달아 전사자가 발생하며 패배가 이어졌다. 당시 정 병장의 소대장이었던 최희남 예비역 대령은 민찬기 중대장과의 대화를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기동타격대였던 우리 부대가 이상하게도 희생자가 적었던 것은 기적이라고 표현하기에는 부족했다. 어떤 기운이 우리를 보호하고 있다고 생각이 들었다. 정명석 병장이 귀국한 뒤 희생자가 늘어나 그를 찾게 되었다. 하나님이 그를 통해 우리에게 무언가를 깨닫게 하고자 하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와 같은 이유로 정명석 병장은 대부분의 군인들이 다시 돌아가고 싶어하지 않던 시기에 자원해 2차 파병을 신청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그곳에 다시 가야만 부대원들을 살릴 수 있다는 하나님의 강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또한, 그곳에서 하나님이 허락하신 생생한 역사와 뜻을 직접 체험하기 위해서였다.(최희남 회고록 『나의 푸른날 베트남 전쟁터에서』 발췌)
실제로 2차 파병(1968년 2월 18일 ~ 1969년 3월 4일) 직후, 그가 소속했던 부대는 전사자가 발생하지 않았고, 전투는 연승으로 이어졌다. 훗날 정명석 병장과 같은 중대 전우였던 정원도 씨는 정 병장이 자신에게 월남전에 참전한 이유는 “인간의 의지나 전술이 아니라, 형제를 내 몸같이 사랑하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기 위함이라고 말했다”고 회고했다.(최희남 회고록 『나의 푸른날 베트남 전쟁터에서』 발췌) 이처럼 그가 두 차례에 걸쳐 베트남전에 참전한 배경에는 단순한 군 복무를 넘어선 의미가 담겨 있다. 그의 행보는 극한의 전쟁터에서도 절대 순종의 조건을 세우며, 하나님의 뜻에 응답하려 했던 신앙인으로서 면모를 보여준다.
수백 번의 실전 속에 기적이...‘전사자는 없었다’
그가 속한 3중대는 연간 작전 횟수가 200회 이상, 파병 기간 총합 3년에 걸쳐 약 600회가 넘는 실전에 투입되었다. 이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한국군 전체 작전 기록을 보아도, 그의 부대만큼 전투 참여가 많고 치열했던 부대는 드물다. 최희남 대령은 희생자가 많을 수밖에 없는 군단급 작전인 ‘오작교 작전’과 ‘홍길동 작전’에서 3중대가 기동타격대였기 때문에 희생자가 많을 수밖에 없었지만 전사자가 나오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이에 대해 그는 정명석 병사가 생명을 위해 기도했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그가 1차 귀국 후 5개월 사이, 3중대에는 전사자가 급증했다. 그런데 2차 파병 이후, 다시 전사자는 나오지 않았다. 작전은 연속해서 승리했다. 일반적인 전쟁의 논리는 간단하다. ‘살기 위해 죽여야’ 한다. 하지만 그는 이 논리를 거부했다. 적군조차 살리기 위해, 생포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 아군뿐만 아니라 적군의 생명도 하나님께 기도하며 지키려 애를 썼다.
최희남 당시 28연대 3중대 1소대장의 증언(영상보기)
구분 | 작전명 | 전과 | 피해 (전사) |
1차 파월 (1966년 8월 30일~1967년 9월 24일) |
도깨비 2호 작전 | 22 | 0 |
마두 1호 작전 | 61 | 0 | |
오작교 작전 | 61 | 0 | |
홍길동 대작전 | 53 | 0 | |
합계 | 197 | 0 | |
귀국 | 닌호아 작전 | 0 | 20 |
은마 1-1호 작전 | 0 | 4 | |
합계 | 0 | 24 | |
2차 파월 (1968년 2월 18일 ~ 1969년 3월 4일) |
은마 1-2, 3호 작전 | 13 | 0 |
도깨비 6호 작전 | 52 | 0 | |
합계 | 65 | 0 |
▲ <전투상보 기록 중 정명석 병장 파월 이력과 소속 3중대의 전과 기록> 베트남 전쟁 연구소 제공
30대
복음을 전하러 출발하기 전에 그동안 산에서 배운 성경 강의를 모두 도표와 그림으로 자세히 그렸다. 가방에 30개론 도표와 도표를 보여 줄 슬라이드 영사기 한 대를 넣어서 길을 떠났다. 그는 '도표는 마치 시대를 살리는 양식 같았다. 슬라이드는 마치 원격 조종 레이더, 가방은 하늘의 비밀이 들어있는 실탄 통 같았다'고 회고한다.
1978년 5월 24일 아침에 고향 땅을 떠났다. 서울까지 가기 전에 충남 배방산에서 일주일 동안 금식하며 극적인 기도를 했다. 이후 5월 31일 서울에 도착했다.
복음의 시작(1978년 6월 1일 ~)

그는 1978년 6월 1일부터 서울에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1978년 6월 1일은 정명석 목사가 서울에 올라 복음 전파를 시작한 역사적인 날로, 기독교복음선교회는 이 날을 알파날로 지정해 기념행사를 열고 있다.
이튿날, 그 집의 초등학생 자녀가 갑작스러운 두통과 고열을 호소했는데 정명석 목사가 기도로 아이의 증세는 깨끗이 호전되었다. 이 일로 가족들은 놀라워하며 정 목사를 3일간 더 머물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후 그는 서울 삼각산으로 거처를 옮겼다. 6월은 비가 많이 오는 우기여서 정 목사는 한 평 비닐 천막을 치고 생활하면서 삼각산 기도원에서 기도를 했다고 한다. 지독한 가난과 추위 속에서 전도 활동이 1년 가까이 계속됐다. 주변 사람들이 삶아준 라면이 식어 한 덩어리가 된 뒤에야 거처에 도착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고된 생활을 견디지 못해 떠나는 제자들을 보내면서도 그는 복음 전파를 멈추지 않았다.
그는 ‘삼각산’에서 ‘종로’, 그리고 ‘행당동’, 이후 ‘성북구’로 가서 복음을 전했고 기도로 아픈 사람들의 병을 낫게 해주며 복음의 터전을 조금씩 다져 나갔다.그러던 중 병든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데 암 환자가 치유되면서, 그가 감사의 표시로 준 현금으로 1980년 3월, 남가좌동에 첫 교회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정신질환자를 고쳐주고, 그가 준 현금으로 어머니가 팔려고 했던 고향 월명동 생가터를 매입할 수 있었다. 그 당시는 알지 못했으나 극적으로 하나님의 자연성전을 건축할 수 있는 핵심지를 지킬 수 있게 된 것이다. 남가좌동 교회에서 정 목사는 공식 직분도 없는 평신도였기에, 목회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단상에 서지 못하는 서러움을 겪어야 했다. 결국 교회를 다른 이가 맡게 되었고, 정 목사는 몇십만 원만 가지고 다시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섰다.
정명석 목사는 같은 해 8월, 좌절하지 않았고 서울 신촌, 이화여대 앞 좁은 문간방, 한 평 정도 되는 방을 얻어 이곳에서 다시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정 목사는 신촌 지역에서 1 대 1 전도를 중심으로 선교를 해나가기 시작했다. 기성 기독교의 문자주의적 주요 교리를 뒤집으며 성경을 이치에 맞고 과학적으로 풀어낸 말씀은 진리에 갈증을 느끼고 있던 수많은 젊은이들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정명석 목사가 상경한 이후 처음 3년간은 전도가 잘되지 않았지만 이 시기에 본격적인 전도가 되기 시작했다.
삼선교 성향원(1980. 10 - 1982. 01)
두 달 만인 1980년 10월 25일, 삼선교(성북구 삼선교 지역의 사회복지 기관 건물, 서울 성북구 삼선동 3가 5번지 소재)로 옮겨 말씀을 전하기 시작했다.
삼선교는 철거 직전의 낡은 건물이었지만 밤낮으로 대학생들이 매일 모여들어 말씀을 배웠다. 좁은 방에 사람들이 밀려오니 정 목사가 벽장 속에 들어가서 강의를 할 정도였다. 대학생과 젊은 직장인들이 말씀을 통해 삶의 의미를 새롭게 찾게 되었다. 당시 정 목사는 하루도 빠짐없이 말씀 강의에 몰두했고, 제자들은 자발적으로 각자의 삶 속에서 복음을 전파했다. 미약하게 시작되었으나 수많은 젊은이들이 전도되면서 새 시대 복음의 역사의 주춧돌이 놓이게 되었다.

정 목사의 복음 전파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보면 삼선교에서 복음의 불길이 타오르면서 교인들이 늘어나자, 정들었던 삼선교를 뒤로하고 1982년 종로구 혜화동 소재 테멘 소극장을 빌려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영동 지하 애천교회 (1982. 03 ~ 1983. 06, 강남구 삼성동 130-1)
5월엔 지금의 코엑스 건물 근처인 40평짜리 영동 지하실에 자리를 잡았다. 당시 예배를 단독으로 드릴 수 있는 공간과 정 목사가 거처할 장소가 마련되기도 했다.
세검정교회 (1983. 06 ~ 1986. 06, 종로구 구기동 125-1)
1983년 6월 20일 세검정으로 교회를 옮겼고 이 시기를 기점으로 국내 지방 개척과 해외 선교의 역사가 시작됐다. 8개 도시에 교회가 만들어졌고, 그는 전국을 다니면서 말씀을 전하며 전도에 주력했다. 해외에는 유학생들을 통해 교회를 세웠고, 한국에서 선교사를 보내기도 했다.
또한, "인간을 개발하라"는 말씀에 따라 공개방송이 시작됐다. 토요일마다 공개방송을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자세히 보기)
1986년 잠원동으로 교회를 이전했고 정 목사가 이끄는 선교회는 9월 ‘예수교 대한 감리회 진리측’이란 독립 교단으로 정식 등록이 되었다.
1987년 서울 낙성대로 교회를 옮겼으며 이때 지방 개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면서 전국적으로 폭발적인 선교의 역사가 이루어졌다.
1990 - 1998

정명석 목사는 진리를 찾아 몰려오는 사람들이 제재를 받지 않고 밤낮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영광 돌릴 수 있는 곳을 찾던 중 월명동으로 눈길을 돌리게 되었다. 이미 1980년대 후반부터 월명동에서 수련회 등 행사를 했지만 그 당시만 해도 월명동이 새 시대 복음의 중심지, 하나님의 자연성전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한다. 1991년부터 본격적으로 하나님이 주신 구상에 따라 월명동을 제자들과 함께 자연성전으로 개발하게 되었다.

1994년 6월 12일 한반도에 전쟁 위기가 고조됐을 당시, 정명석 목사와 기독교복음선교회 지도자 1만여 명이 고려대학교 노천극장에 모여 구국기도회를 개최했다. 이후 같은 해 6월 16일부터 17일까지는 월명동 자연성전으로 장소를 옮겨 철야기도를 이어갔다. 기도회 이후 21일만인 7월 8일 새벽 2시, 북한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며 전쟁 위기는 해소되었다. 당시 정명석 목사는 "전쟁은 여호와께 달려 있다. 우리는 진실로 회개하고 기도했다. 총보다 더 강하고, 원자폭탄도 해결하지 못할 문제를 기도로 풀었다"고 밝혔다.
1995년 8월 15일 광복절에 몽산포 해변가에서 한국과 일본 교인들이 모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행사를 했다. 기도해서 밀물이 멈추는 기적이 일어났다.(영상으로 자세히 보기) (글로 자세히 보기)
정명석 목사는 밀물이 멈춘 것을 보고 아래와 같이 말했다.
"이런 것들은 성삼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입니다. 나는 이것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늘 함께하십니다. 내 영광, 내 칭찬이 아니고 하나님께 영광과 칭찬을 돌려야 합니다. 내가 내 힘을 갖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날 무슨 표적 하나를 보이시려고 아침부터 준비하셨다가 저를 통해서 시작 버튼을 누르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이 나타나시도록 여건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때 하나님께 영광 돌리느라 정신 못 차리고 분주했습니다.
특히 마지막 배구 시합을 할 때, 상대편은 9명인데 저는 2명만 데리고 날아다니듯 배구를 했습니다. 기적은 그럴 때 일어납니다. 우리가 표적을 보일 때, 하나님도 표적을 보여 주십니다. 항상 사람이 먼저 표적을 보여 주어야지, 하나님도 표적을 보여 주십니다. 무조건 하나님께 표적을 보여 달라고만 하면 안 됩니다."

해외선교( 1999년 ~ )
1999년 이전부터 한국에서만 복음을 전할 것이 아니라 해외로 나가 복음을 전한다는 이야기를 해 왔고 그 말대로 1999년 1월, 해외로 출국했다.
1999년 2월, 독일에서 마틴 루터가 피신했던 안나 교회에 가서 기도하고, 1999년 8월에는 프랑스에서 국제 평화 행사를 개최했다. 1999년 10월에는 밀라노 두오모 성당에 가서 천주교와 개신 기독교의 싸움을 두고 화해와 평화의 역사가 이루어지길 기도했다.
2001년 9월에는 말레이시아 포딕슨 해변에서 말씀을 전했다. (자세히보기)
이탈리아의 로마부터 유럽과 아시아, 남미 전역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여러 책들을 집필했다. 그리고 독일, 영국, 프랑스, 이태리 등의 나라들을 모아서 평화 대회를 했다.

GACP 대회 개최 현황
날짜 | 장소 | 행사명 |
1999년 8월 | 프랑스 파리 | 제1회 국제 평화 축구 대회 |
1999년 10월 | 이탈리아 밀라노 | 제2회 국제 평화 축구 대회 |
2000년 4월 | 독일 슈투트가르트 | 제3회 국제 평화 축구 대회 |
2000년 9월 | 영국 런던 | 제4회 세계 친선 축구 대회 |
2001년 8월 | 미국 하와이 | 제5회 세계 평화 교류 대회 |
2002년 8월 | 한국 대전 | 제6회 GACP 컨퍼런스 |
2003년 8월 | 캐나다 밴쿠버 | 제7회 GACP 컨퍼런스 캐나다 2003 |
2004년 8월 | 일본 나가노 | 제8회 GACP 컨퍼런스 일본 2004 |
2009년 - 2018년 2월
그는 2009년부터 10년 동안 기도하며 엎드려 쉬지 않고 말씀을 써서 전했다. (자세히 보기)
불가능한 환경일지라도 그는 기도하며 말씀을 써서 보냈고(자세히 보기), 만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다.(자세히 보기)
매일 주님께서 자신과 함께 해주셔서 할 수 있었다며 끊임없이 주님을 증거했다. (자세히 보기)
2018년
1966년부터 1969년까지 베트남 전쟁에 두 번이나 참전하여 그 체험담을 바탕으로 참전 회고록 『전쟁은 잔인했다. 사랑과 평화다 1~4권』(2018)을 출간했다. 여기서 생명 사랑과 평화 실현을 위한 그의 남다른 노력, 그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생생하게 증헌하고 있다. (자세히 보기)
정명석 작가의 문학에 대해서
정명석 시인은 1995년 월간 《문예사조》로 등단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구원의 말씀》 1~3, 설교집 《생명의 말씀》 《성약의 새말씀》1~24집, 잠언집 《하늘말 내말/지혜의 잠언》 1~11집, 《영감의 시》 1~14집 등이 있으며 한국 시문학 100년사를 망라한 《한국시 대사전》(2011)에 그의 시 10편이 등재되었다.
또한 《지촌미술제》, 《도화개인전》, 《아시아청년국제교류전》 등 국내 및 국외(영국, 프랑스, 독일, 아르헨티나 등)에서 그림과 서예 작품 다수를 전시했고, 국제문화예술평화협회(GACP)의 총재로서 평화를 위한 예술, 스포츠 등의 활발한 문화교류 활동을 지원하고 있다.

정명석 목사의 설교 영상 보기
아래의 설교는 정명석 목사의 설교 중 일부분입니다.
일시 | 주제 |
2022. 03. 06 / 주일설교 |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확실하게 믿고 사랑하여라(영상보기) |
2021. 07. 04 / 주일설교 | 무엇을 하려면 완벽하게 해야 한다(영상보기) |
2021. 07. 04 / 주일설교 | 준비해야 주를 맞는다(영상보기) |
2021. 03. 21 / 주일설교 | 영이 영원히 산다는 것을 믿어라(영상보기) |
2020. 12. 13 / 주일설교 | 삼위일체께 감사와 영광 (영상보기) |
2020. 12. 09 / 수요설교 | 받았으니 감사하라(영상보기) |
2020. 11. 15 / 주일설교 | 주가 영원한 생명의 길이다(영상보기) |
2020. 08. 02 / 주일설교 | 천국이란 (영상보기) |
2020. 04. 12 / 주일설교 | 지혜가 제일이다 (영상보기) |
2020. 04. 05 / 주일설교 | 항상 감사하라 (영상보기) |
2020. 01. 19 / 주일설교 | 화평케 하는 자 복을 받는 자다 (영상보기) |
2019. 11. 06 / 수요말씀 | 너희 염려를 주께 맡겨버려라(영상보기) |
2019. 06. 23 / 주일설교 | 목적을 이룬 삶을 살아라1(영상보기) |
2019. 06. 19 / 수요설교 | 순간의 때를 놓치지 말아라 (영상보기) |
2019. 06. 02 / 주일설교 | 목적을 이룬 삶을 살아라3(영상보기) |
2019. 04. 28 / 주일설교 | 더 잘하면 더 잘된다 (영상보기) |
2019. 04. 21 / 주일설교 | 하나님을 앙모하는 자는 이기리라(영상보기) |
2019. 12. 08 / 주일설교 | 주가 답이다 모두 주를 보고 한 말이다 (영상보기) |
2019. 03. 10 / 주일설교 | 내가 네 옆에 있으니 염려 말아라(영상보기) |
2019. 03. 10 / 주일설교 | 효도는 부모의 마음을 맞춰주는 것(영상보기) |
2019. 03. 10 / 주일설교 | 육신을 잘 관리해라(영상보기) |
2019. 01. 13 / 주일설교 | 할까 말까 하지 말아라 (영상보기) |
2019. 01. 06 / 주일설교 | 구하는 자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 (영상보기) |
2018. 11. 29 / 새벽설교 | 형제를 미워하지 말아라(영상보기) |
2018. 10. 10 / 수요설교 | 개성대로 사랑해 주시는 하나님(영상보기) |
2018. 10. 07 / 주일설교 | 하나님 사랑함을 영원히(영상보기) |
2018. 10. 07 / 주일설교 | 사랑의 두 가지 계명(영상보기) |
2018. 09. 09 / 주일설교 |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영상보기) |
2006. 10. 22 / 주일설교 | 사랑에는 무기가 없다(영상보기) |
2006. 08. 06 / 주일설교 | 선생님과 청소(영상보기) |
1998. 11. 15 / 주일설교 | 여호와께 감사하자(영상보기) |
1998. 03. 22 / 주일설교 | 무엇이 두려우냐(영상보기) |
1998. 03. 22 / 주일설교 | 하나님과 인간사이(영상보기) |
1998. 03. 22 / 주일설교 | 지금은 경건해야 할 때(영상보기) |
1998. 03. 22 / 주일설교 | 하나님께 가장 감사할 일은(영상보기) |
1998. 01. 18 / 주일설교 | 인생에 힘든 일이 있을 때(영상보기) |
1996. 05. 12 / 주일설교 | 잘 가르쳐 주어라(영상보기) |
1996. 05. 12 / 주일설교 | 유일신 하나님(영상보기) |
1996. 05. 12 / 주일설교 | 나의 참스승 예수님3(영상보기) |
1996. 05. 12 / 주일설교 | 수고를 아끼지 말아라(영상보기) |
1996. 05. 12 / 주일설교 | 4대 교리(영상보기) |
1996. 05. 12 / 주일설교 | 만들어봐야 뭐가 될지 안다(영상보기) |
1995. 05. 16 / 부흥집회 | 여호수아의 태양을 멈춘 기적(영상보기) |
1994. 01. 30 / 주일설교 | 뛰는 자만이 살아남는다 (영상보기) |
1992. 03. 15 / 주일설교 | 신앙전공화 (영상보기) |